장경덕 작가·번역가
장경덕 작가·번역가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는 이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실러, 프리드리히 헤겔 같은 이들과 같은 반열에 드는 독일 철학자다. 피히테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점령된 베를린에서 1807년 말부터 이듬해 봄까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우국 강연을 한다. 강연에서 그는 새로운 국민교육을 부르짖는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그가 이렇게 단언했다고 전한다. “교육은 자유의지를 파괴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학생들이 그렇게 배운 후 남은 평생 교사가 바랐을 것과 달리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탈리아 교육자 마리아 몬테소리(1870~1952)는 그보다 한 세기 늦게 태어났다. 그녀의 교육관은 피히테와 반대였다. 1906년 로마에 문을 연 그녀의 학교에는 미리 짜놓은 일과 시간표나 교사의 지시, 줄 맞춘 책상, 학년, 그리고 산업화한 세계의 기초 교육에 들어가는 표준화된 요소들이 없었다. 전통적인 사고는 아이들을 온종일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면 그들은 행복하게 해줄 수 있고 심지어 창의적으로 되도록 할 수도 있지만 잘 읽고 쓰고 셈하게 할 수는 없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몬테소리라는 그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선진국의 보편적인 아동 교육은 19세기 중반 프로이센의 초등학교 체제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산업화 시대의 수요에 맞춘 공장식 교육 시스템이었다. 몬테소리의 학교는 자유의지를 파괴하는 전통적인 교육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것이었다. 이 학교는 어린이들이 타고난 학습자이며 얼마든지 스스로 집중하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통찰에 바탕을 두었다. 영웅적인 교사나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전통적인 교육 시스템의 잘못된 가정을 버리고 재상상하는 것이 중요했다.

‘제2의 기계시대’와 ‘포스트 피크’의 저자인 앤드루 맥아피 MIT 교수는 세 살 때부터 몬테소리 스쿨을 다녔다. 그곳에서는 맘껏 자유를 누릴 수 있어서 좋았다. 최대한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물건을 때려 부수고 고함치며 뛰어다니고 서로 겁을 주며 싸우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앉아서 배우고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자유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누릴 수 있었다. 4학년부터는 공립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맥아피는 종일 같은 책상에 앉아서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보다는 정해진 과목을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돌아가며 배우는 체제, 자유와 자율 대신 무의미한 위계 구조에 순응해야 하는 체제를 결코 좋아할 수 없었다. 뭔가 부모님이 화를 낼 만한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꺾어놓을 재교육 캠프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맥아피는 2004년 구글의 공동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바버라 월터스와 한 인터뷰를 기억한다. 월터스는 교수와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두 사람의 가족적 배경이 성공 요인이었는지 궁금해했다. 페이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둘 다 몬테소리 스쿨에 다녔어요. 저는 그것이 규칙과 명령에 따르는 대신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고,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질문하고, 여러 일을 조금 다르게 하는 훈련의 일부였다고 생각해요.”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도 어릴 때 몬테소리에 다녔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베이조스가 “몬테소리 유치원에서 자기 활동에 너무나 몰두해 선생님들이 말 그대로 의자에서 들어내 다음 과제로 옮겨가도록 해야 했다”고 밝혔다. (베이조스는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떠올리며 저소득층 자녀들이 몬테소리 유치원에 다닐 수 있게 지원하는 자선사업도 벌인다.)

몬테소리의 교육 방식은 오늘날 기업에 필요한 혁신과 창의성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맥아피는 지난해 펴낸 ‘긱 웨이(The Geek Way)’에서 마리아 몬테소리를 “긱(geek)들의 수호성인”이라고 치켜세웠다. 실제로 몬테소리 자신이 진정한 긱이었다. 긱은 ‘바보(Geck)’나 ‘미친(geck) 사람’을 뜻하는 독일어에서 영어로 넘어온 말이다. 20세기 대부분 기간에 미국에서 긱은 축제나 서커스에서 살아있는 닭이나 뱀의 머리를 물어뜯는 기괴한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을 뜻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컴퓨터에 광적으로 몰두하는 사람을 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당초 긱은 주류에서 벗어나 있고 사회성이 부족한 괴짜의 이미지가 강했으나 오늘날에는 디지털 혁명의 최전선에서 달리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인물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긱 방식’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장경덕 작가·번역가

33년간 저널리스트로서 경제와 기업을 탐사했다. 『애덤 스미스 함께 읽기』 『정글 경제 특강』 등을 썼고 『보수주의』 『21세기 자본』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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